티스토리 뷰

에밀 아자르의 소설 (자기 앞의 생)에는 로자와 모모를 통해서 안락사에 대한 생각이 많이 나온다. 여기에 그들이 생의 마지막을 바라보며 왜 그토록 안락사를 원했는지 살펴보겠다.

로자 아줌마는 왜 그토록 안락사를 원했는가?


로자는 평생 창녀로 살다가 인생 후반을 창녀가 낳은 아이를 키우며 살았다. 그녀는 온 몸이 병들고 치매까지와서 정신이 오락가락한다. 그녀는 병원에서 고통속에서 죽는 것을 너무 싫어했다. 병원이란 사람이 죽도록 내버려두지 않고 최대한 오랫동안 고통을 받도록 하는 곳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고통이 뭔지 안다. 고통을 끔찍이도 두려워했다. 마지막 죽으면서까지 그런 고통 속에 있고 싶지 않다. 그녀는 아마 창녀로 살면서 아니면, 나치 수용소에서 겪은 고통을 다시 겪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로자는 프랑스에서는 안락사를 반대하기 때문에 고통을 이겨낼 힘이 남아있는 한 고통을 강요한다고 생각한다. 노인의 마지막 삶이 고통의 시간이라면 정말이지 진저리나게 싫다.

모모는 아줌마가 개였다면 진작에 아줌마를 안락사 시켜서 그런 고통에서 해방시켜 주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사람 보다 개에게 더 친절하기 때문이다.

하밀 할아버지를 보면서도 모모는 안락사에 대해 생각한다. 자연이 노인을 공격하고 그들의 생명을 야금야금 파먹도록 내버려두면서 절대로 고통없이 죽게 내버려 두지 않는다. 고통을 받을만큼 받으면서 눈알이 튀겨져 나올 때까지 고통 속에 노인을 내버려둔다.

로자 아줌마는 모모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준다.
" 모모야 그들은 나를 억지로 살려 놓으려고 할 거다. 병원이란 늘 그모양이야. 그들이 나를 죽지 않게 하려고 온갖 학대를 다 할거다. 그들은 처방전을 가지고 있어 . 그들은 끝까지 괴롭히면서 죽을 권리조차 주지 않을 거야"
이렇게 병원과 의사들이 노인의 생명을 놔주지 않고 고통속에 놔둘 거라고 이야기 한다.

최후의 결정은 의학이 하는 것이고, 의학은 하느님의 의지와 끝까지 싸우려 한다는 것을....

이런 모모의 생각은 자연의 이치를 거스리는 것이 의학이라고 말해주는 것 같다. 의학이 마치 신의 뜻 보다 우위에 있는 것처럼 세상을 지배하는 모양새다. 모모는 카츠선생님에게 로자를 안락사시켜 달라고 하지만, 의사 카츠선생님은 내게 그럴 권리가 없다고만 한다.

모모는 이해할 수 없다. 엄마 뱃속에 있는 아기에게는 가능한 안락사가 왜 노인에게는 금지되어야 하는지 말이다. 식물인간으로 세게에서 가장 오래 산 미국인은 예수 그리스도 보다 더 심한 고행을 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십자가에 17년을 매달려 있는 셈이니까. 더 이상 살아갈 능력도, 살아갈 의지도 없는 사람의 목구멍에 억지로 생을 넣어주는 일 보다 더 구역질나는 일은 없다고 생각한다.

이렇듯 전혀 살 가망이 없는 로자 아줌마를 고통 속에 지내게 한다는 것은 말이 안되는 것이다. 모모는 로자 아줌마가 죽어서 떠나는 것은 싫지만, 그녀가 고통 속에서 오래 사는 것은 더 싫었다. 고통 없이 그녀를 보내 주고 싶었던 것이다.

쓸쓸한 가을 벤치
가을 낙엽과 벤치


노인에게 안락사를 허용해준다면?



모모가 말하는 안락사에 대해 읽으면서, 나도 십분 이해하고 공감했다. 어린 소년 모모를 통해, 에밀 아자르는 안락사에 대해 사회에 이야기 하고 싶었던 것 같다.

이 소설이 1975년 그의 나이 61세에 발표되었는데, 그도 늙어가면서 죽음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던 것 같다.

1970년대에도 노인의 안락사에 대해서는 관용적이지 않았다. 이렇게 거의 40년이 지난 오늘에도 안락사는 쉬운 주제는 아니다. 요양원마다, 요양병원 마다 노인들이 온갖 줄을 주렁주렁 매달고 생명을 연장하고 있다. 내 생각으로는 삶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다. 그냥 그들을 고통 속에 방치하고 있다는 느낌만 든다.

나도 나이가 들어가니, 어떻게 죽는 것이 가장 인간적이고 존엄한 최후를 맞이하는가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자기 스스로 삶을 꾸려나가지 못하고, 의학의 힘으로 심장을 뛰게하는 것은 사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침대에서 한 발짝도 나오지 못하고, 똥과 오줌을 싸고, 자기 손으로 밥을 먹기는 커녕, 입으로 씹어 넘기지도 못하는 노인에게 콧줄로 음식을 집어 넣는 것은 인간에 대한 학대 같다는 생각이 든다.

눈도 뜨지 못하는 노인을 데리고 장사를 하는 현대의학의 모습이다. 생명존중이니 이런 말로 포장해서 노인의 생명을 가지고 장사를 하는 것 밖에 달리 생각할 것이 없다.

본인이 진정으로 이런 고통스런 최후를 원하지 않는 사람에게 이젠 법이 응답해야 한다. 안락사에 대해 진지하게 더 토의하고, 자신의 생명을 자신이 거둬들일  수 있는 법 제도를 만들어서 더 이상 노인의 생명이 비즈니스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정말 빨리 안락사 또는 존엄사가 법의 테두리에 들어와서 더 이상 고통 속에서 생명을 연장하는 일은 없어야겠다.

여기 안락사에 대한 글은 나자신도 나이들어감에 따라 죽음이 자꾸 생각나기 때문에 나름대로의 생각을 쓴 것이다. 이 부분은 좀 예민한 부분이긴 하지만, 이제는 많은 목소리가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썼다.

언젠가 죽음이 개인의 선택이 되고, 노인이 자살하는 일이 없기를 바래서이다. 자살은 뭔가 생을 부정적인 방법으로 마감한 느낌이든다. 또한 자녀나 주위 사람들에게 좋지 않은 기억을 줄 것 같아서 안좋다.

만약 노인에게 안락사나 존엄사를 선택할 수 있다면, 미리 자녀와 충분히 상의를 하고, 모든 신변을 정리하고, 좋은 날을 잡아서 이별하면 될 것이다.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노인의 아름다운 마지막이다.

만약 자신이 정말 이 생을 다 살았다고 생각하는 순간, 밥을 먹을 힘조차, 화장실을 해결할 힘조차 남지 않았을 때, 선택할 수 있는 아름다운 선물 같은 것이라 생각한다.

존엄사법이 제정 되어서 고통 속에서 죽음을 기다리지 않고 노년을 마음 편하게 지냈으면 좋겠다. 나는 나 자신이 고통을 덜 받고 죽음을 맞이하길 바란다. 그냥 지금 나의 생각이다.

반응형